질문하시면 답변을 해주십니다.(질문과 답변이라는 곳이 있으며 조금 늦더라도 순일스님께서 답해주십니다.)
먼저 달의 바다님이 올린 순일스님의 글과 달의 바다님의 질문을 올리며 마지막에 저의 참고 글 순서로 합니다.
1) 순일스님의 삼매
(이글은 조금 예전의 글입니다. 지금은 사마디, 사마타, 자나, 위빠사나로 명확히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그냥 삼매라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글은 직접 쓰신 것이 아니고 도반 중의 한 분이 청취해서 정리하여 올린
것으로 압니다. 이것을 고려해서 보시길 바랍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서 중요한 것이 계정혜 삼학(三學)입니다. 저번 글은 계에 속한 것이며, 이번 글은 정(定)에 대한 말씀입니다. 팔리어로 사마디(sammadhi)를 한자로 의역한 것이 선정(禪定)이며, 음역한 것이 삼매(三昧)입니다. 부처님께서 삼매를 정의하시길 ‘산란한 마음이 단일한 마음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삼매를 8가지로 모두 설하신 경우와 4가지로 설하신 경우가 있으십니다. 부처님께서는 크게 본다면 해탈을 두 가지로 설해주셨습니다. 하나는 양면해탈(心해탈과 위빠사나 해탈 둘 다를 이룬 해탈)이며 또 다른 하나는 위빠사나 해탈만 이룬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양면해탈을 이루셨다고 하셨으며 이것보다 수승한 해탈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초기경전을 결집한 오백 명의 해탈하신 아라한들은 모두 양면해탈하신 분들로만 이루어졌습니다. 보통 위빠사나 해탈은 4가지 삼매를 익히며 양면해탈은 8가지 삼매를 정순으로 또한 역순으로 100프로 증득하고 상수멸까지를 증득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8가지의 삼매를 모두 살펴보겠습니다.
1.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고 희열과 행복이 가득한 초선(初禪)에 들어 머뭅니다.
2.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뭅니다.
3.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정념정지가 있고 몸으로 행복을 경험합니다. 이를 두고 성자들이 평온하게 사티가 확립되어지고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뭅니다.
4.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버렸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사티를 버려서 청정한(사티가 청정한) 제4선(四禪)에 들어 머뭅니다.
5. 물질에 대한 상(相)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상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空無邊處)를 구족하며 머뭅니다.
6.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식(識)’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를 구족하며 머뭅니다.
7.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無所有處)를 구족하며 머뭅니다.
8. 결코 상(相)이 아니며, 비상(非相)도 아닌 비상비비상(非相非非相)에 머뭅니다.
여기서 비상비비상을 초월하여서 상수멸(相受滅)을 증득해야 무여열반이 됩니다.
마음 다루기 불교초기경전강의|순일스님|
1. 먼저 초선을 살펴보겠습니다. 초선은 일심삼매의 맨 처음 삼매이긴 하지만 엄밀하게는 이선부터가 진정한 일심삼매(一心三昧)입니다. 즉 초선은 외부세계와 내면세계의 교집합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외부세계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눈, 귀, 코, 혀, 몸, 뜻)가 바깥의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법)과의 접촉을 통하여 바깥쪽으로 감각적 욕망의 산란한마음이 치달리는 것을 뜻합니다. 내면세계란 바깥쪽으로 치달리는 육근(六根, 안이비설신의)을 색성향미촉법과의 접촉을 끊고(주의와 관심을 끊고) 내면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근이 바깥의 색성향미촉법과의 접촉을 끊으려면 무엇인가 내면으로 향하게 할 ‘조건’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조건’이 바로 하나의 ‘수행주제’입니다. 이와 같은 ‘수행주제’는 서로의 수행체계에 따라서 다양성을 띱니다.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삼매의 수행주제를 주셨습니다.
땅, 물, 불, 바람, 빨강색, 노란색, 파란색, 흰색, 빛, 허공, 아뢰야식.
맨 처음 일단 사유로서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리는 과정을 갖습니다. 이렇게 하여서 외부로 치달리는 산란한마음을 내면으로 향하게 합니다. 그런 후에 위의 수행주제 중에서 하나를 ‘일으킨 생각’으로 잡습니다. 이때 다시 마음은 외부세계(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법들)로 치달리고자 합니다. 즉 다른 망념이 ‘수행주제에 대한 일으킨 생각’을 대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본래의 수행주제를 잡겠다고 ‘일으킨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 날 수행주제에 대한 ‘지속적인 고찰’이 되며, 그 순간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법들에 대한 산란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이것은 마음은 동시에 두 개가 존재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써 즉 ‘지속적인 고찰이라는 마음’이 있으면 여타의 산란한 마음은 그 순간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이 ‘지속적인 고찰만이 있을 때’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법들을 떨쳐 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가득하게 됩니다. 여기서 희열은 온 몸에 전율을 동반하면서 퍼집니다.
2. 이선을 살펴보겠습니다.
초선에는 노력이 있었으며, 이선에서는 노력이 점점 가라앉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의 노력’이 점점 가라앉습니다. 이때 마음에는 오로지 수행주제 하나만 단일하게 존재합니다. 단일한 수행주제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마음은 단일한 상태로써 일심삼매(一心三昧)입니다. 여기 이선에서 진정으로 ‘마음의 단일한 상태의 삼매’이며 이제 내면으로 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초선은 외부와 내면의 중간적인 교집합상태라고 위의 초선에서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가라앉았던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더 나아가 사라지며 희열과 행복이 가득한 제2선에 머물게 됩니다. 여기서 이선의 삼매상태를 현상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기 눈앞에 긴 양초(candle)와 짧은 양초 이렇게 두 개가 있다면 이 상태에서 먼저 ‘양초’라는 단어를 잊어먹습니다. 그리고 ‘긴 과 짧은’을 모릅니다. 거울에 비추이듯이 초들의 영상은 선명하게 들어오지만, 초라는 이름과 길거나 짧은 것이라는 분별은 지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아기일 때 초라는 영상을 봅니다. 그리고 긴 것과 짧은 것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초’라는 이름을 배웁니다. 요약하면 처음에는 영상만 있으며 나중에 간단한 판단분별을 하고 나아가서 복잡한 판단분별을 하게 되는 과정이 마음이 산란해지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역순으로 하여서 복잡한 판단분별이 먼저 사라지고, 간단한 판단분별이 사라지면 오직 ‘영상’만이 남게 됩니다. 이때에 영상을 제외한 모든 것은 공(空)하며 오직 영상에 관련된 것만이 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일심삼매입니다.
3. 삼선에서는 초선과 이선의 희열이 빛바랩니다. 마음이 외부로 치달릴 때에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기쁨(또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내면으로 향했을 때는 산란한 마음은 사라지며 감각적 욕망에서 기인한 기쁨으로는 맛볼 수 없는 본성(本性)의 희열과 행복이 있게 됩니다. 여기서 초선과 이선의 본성에 의한 희열은 바깥 세계에 비해서는 지복스럽지만 더 높은 삼매에 비해서는 덜 고요합니다. 그러므로 희열이 빛바랜 것을 조건으로 마음으로 평온하게 머물며 정념정지(正念正知)가 있으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약한다면 정념정지가 있고 온 마음과 몸으로 평온하며 행복을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정념은 바른 사티이며, 정지는 ‘바른 앎’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누구나 다 금번 생을 낱낱이 본다고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저도 21살 때에 설악산에서 조난당해서 죽음에 처했을 때 20여년 살아온 삶을 찰나에 다 보았습니다. 특이한 점은 저의 모습이 바깥에서 다 보인다는 것이며, 남의 마음도 다 내 마음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마치 누가 카메라로 다 들여다보고 찍은 듯이… 이것이 바로 ‘바른 앎’입니다. 즉 상대적으로 바른 앎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바른 앎입니다. 이러한 정지는 정념의 공부의 깊이에 따라서 비례합니다. 정념이 궁극에까지 이르게 되면 실견실지(悉見悉知, 다 보고 다 앎, 전지전능)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3선에서는 본성의 무더기가 어느 정도 드러났으므로 온 마음과 몸으로 행복을 경험하는 것이며, 성자들이 이러한 3선을 좋은 것으로 평가할 만큼 이것은 높은 상태입니다.
4. 3선까지 닦은 사람은 내면이 지고의 지복스러운 상태입니다. 이러한 행복도 버리는 것이 4선이 됩니다. 행복이 괴로움의 원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버려서 괴로움도 같이 모두 소멸 된 것입니다. 아울러 그 이전에 세간적인 기쁨과 슬픔은 이미 버렸습니다. 즉 파동이 큰 세상의 행복과 슬픔은 이미 예전에 버렸고, 이제 내면의 지고한 행복도 버렸기 때문에 괴로움도 모두 사라져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사티를 버려서 청정한(사티가 청정한으로도 해석함) 제 4선에 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초기경전에서 말씀하시길 ‘즐거운 것들이 있는 즐거운 장소에서 즐거운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존재의 원인이며 존재가 윤회의 원인이다’라고 하십니다. 또한 ‘즐거운 것들이 있는 즐거운 장소에서 즐거운 것들을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이 해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즐거움과 괴로움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즐거움을 소멸함으로써 모든 괴로움이 소멸하며 종국에는 지고의 청정한 해탈을 이루게 됩니다.
5. 공무변처를 쉽게 이해하려면 먼저 12연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다음은 12연기입니다.
1. 무명(無明)
2. 의도
3. 식(識)
4.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
5. 색성향미촉법(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법)
6. 접촉(부딪힘)
7. 느낌
8. 갈애
9. 취함(얻음)
10. 이루어짐
11. 생(生)
12. 노병사(老病死)
여기의 12연기에서 4번(안이비설신의)과 5번(색성향미촉법)의 접촉인 6번이 소멸하면 그것이 공무변처입니다. 이와 같이 4와 5의 접촉인 6이 사라지면 나도 세상도 모두 초월하게 되어서 공이 가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즉 부딪힘의 인식이 소멸하면 모든 물질의 상을 초월하게 됩니다.
앞서서의 일심삼매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먼저 세상의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법들에 대한 주의와 관심을 하나의 수행주제에 대한 몰입(지속적인 고찰)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종국에는 그 수행주제마저 사라집니다. 그때 내면의 무한 본성으로 향하게 되며, 공무변처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때 마음은 무심(無心)이며 여기 있었던 세상과 나는 사라집니다.
6. 여기 12연기의 3번인 ‘식(識)’이 바로 무한한 식이 됩니다.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면 ‘무한한 식의 세계’가 드러납니다. 식무변처에서는 내면으로는 가이 없는 식으로 들어가며, 바깥쪽으로는 세상이 가이 없이 들어옵니다. 이즈음 꿈에서 선명하게 깨어있게 되며, 가이 없이 모든 지혜가 꿈에서 점차로 깊이 있게 드러납니다. 식의 세계는 대낮의 의식 세계의 시공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앞서서 설악산에서 죽음에 이르러서 찰나에 20년을 낱낱이 본 것을 말했듯이 아뢰야식은 대낮의 의식이라는 것의 시공을 초월해 있습니다. 예로서 현재의식(대낮의 의식)이 우주를 낱낱이 보려면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아뢰야식이 의식이라는 모니터에 뿌려준 것을 비추어서 보여지는 시간은 1초도 안 걸립니다.
공무변처와 식무변처를 연 이어서 비유해보겠습니다. 여기 양평의 순일선원 앞에는 한강의 지류가 안쪽으로 조그맣게 들어와 있습니다. 만약 그 강이 마음이 있다면 자기는 안쪽으로 들어온 조그만 강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어느 날 그 강이 자기 물(수면)위에 비추이는 그림자인 구름도 보고, 나무도 보고 하다가 그것들을 보는 것이 산란한 마음이라고 여기고서는 강의 수면 밑으로(내면으로) 깊이 들어갑니다. 그 때 수면위의 나무도 구름도 다 사라질 것(초월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조그만 강의 지류가 아니며 한강 너머까지 모두 하나의 강인 것을 알게 됩니다(공무변처). 나아가 수심으로 편재한다는 것은 수면위로도 편재한다는 의미가 되며 한국의 모든 강의 수면위로 편재합니다. 그때 세상이 가이 없이 들어오게 됩니다(식무변처).
7. 무소유처에 들면 ‘아무것도 없는 세계’가 펼쳐집니다. 굳이 있다면 ‘의도’만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8. 비상비비상에 들면 형체 없는 ‘깨어있음, 불성’이 드러납니다. 꿈 없는 깊은 잠에서 마음은 온전히 잠이 들었는데 깨어 있는 ‘그 무엇(위빠사나의 무더기)’이 드러납니다. 형체 없는 그것이 점차로 다른 경지로, 점차로 다른 경지로 이렇게 구경까지 편재하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각성(깨어있음, 다 알고 다 봄)’은 불멸이며 마음이 아니며, 그 마음이 죽을 때도 이면에서 지켜보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여기까지 삼매에 대하여 통론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삼매의 공통점은
1. 언어적 형성(의도)이 소멸하며
2. 신체적 형성이 소멸하며
3. 마음의 형성이 소멸하는 차례를 거칩니다.
또한 모든 삼매의 공통점은 ‘전체상 없는 삼매’입니다. 깊이로는 모양(꼴)이 더욱더 없는 삼매이며 넓이로는 전체상 없이 편재하는 삼매가 됩니다.
부처님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온전한 눈을 갖추었고 시야에 대상들이 들어올 때에 그것들에 주의와 관심을 주면 마음은 일어난다.
온전한 눈을 갖추었고 시야에 대상들이 들어올 때에 그것들에 주의와 관심을 주지 않으면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