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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봉황산 부석사 - 수많은 국보와 보물을 품은 천년고찰 -<1편>

공 합장 2015. 12. 9. 15:36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소백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부석사(浮石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로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16(676)에 의상조사가 왕명에 의해 창건한 화엄십찰의 한곳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절의 이름이 선달사(善達寺) 혹은 흥교사(興敎寺)라고도 불리었으며,

부석사(浮石寺)라 이름하게 된 것은 본법당인 무량수전의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위 바위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전합니다.

 

특히 한국의 건축가들이 뽑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

고려시대의 목조건물로서 오랜 역사도 지니고 있지만 가운데가 불룩한 배흘림기둥과

사뿐히 고개를 든 아름다운 추녀 곡선은 한국 건축미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주 부석사(浮石寺)는 수많은 국보와 보물을 품고 있는 천년 역사의 고찰로서

국보 제17<부석사석등>, 국보 제18<무량수전>, 국보 제19<조사당>,

국보 제45<아미타여래좌상>, 국보 제46<조사당벽화>, 보물 제220<자인당

비로자나불>, 보물 제249<삼층석탑>, 보물 제255<당간지주>, 보물 제735

<고려각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원융국사비> 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2014819일 촬영)

 

 

 

▲ 오늘은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부석사> 탐방을 여름 휴가기간 중에 실행에 옮기는 날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밤새 내리던 비가 아침이 되어도 그치지 않고 계속 오락가락 합니다.

 

 

 

부석사 주차장 입구에 있는 <관광안내소>입니다. 팔작지붕 형식의 절집처럼 한옥으로 지었습니다.

 

 

 

주차장 바로 옆에는 시원한 연못과 인공폭포가 있어 여름날의 더위를 식혀주고,

주차장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한식 식당들과 민박집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산속에 지어진 우리나라 사찰은 대부분 길게 수직적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심축을 따라 사찰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의 높낮이가 높아지도록 배치되어 있지요.

소위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성인데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의 도입 공간이 기()라면

대석단 위의 범종루까지 전개해 나가는 공간이 승()에 해당되고, 이곳에서 축이 꺽여

전환점을 맞는 안양루까지가 전()의 공간이며, 안양루와 무량수전은 종국점이 되므로

()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석사안내도를 눈여겨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사찰의 전체적 전각배치가

중앙 진입로를 기준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어 마치 빛날 화()자로 보인다는 겁니다.

 

 

 

관광안내소에서 부석사 경내까지는 몸과 마음을 힐링할 수있는 산책길이 이어지는데

길 양쪽으로 은행나무 신록이 싱그럽습니다. 가을이 되면 노란 은행나무 터널로 변하겠지요.

 

 

 

부석사 경내로 오르는 길 도중에는 양쪽으로 영주의 명물인 사과밭이 이어집니다.

 

 

 

비에 젖은 사과들이 탐스럽고 맛있게도 생겼습니다. 따먹고 싶은 생각에 침이 넘어 가네요..^^

 

 

 

 

 

조금 걸으니 <일주문(一柱門)>이 나타나는데, 부석사 일주문은 1980년에 세웠다고 합니다.

사찰에 들어설 때는 오직 일심으로서 세속의 번뇌로 인해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일주문입니다.

 

 

 

앞쪽에는 '太白山浮石寺(태백산부석사)', 뒷편에는 '海東華嚴宗刹(해동화엄종찰)'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부석사가 위치한 곳은 지리적으로 소백산의 한 자락이지만, 백두대간이

이곳에서 지리산 쪽으로 방향을 바꾼 지점이라서 '태백산부석사'라고 했답니다.

 

 

 

일주문을 지나서 자갈이 깔린 울창한 숲길을 걷다보면 천왕문을 앞두고 길 왼쪽으로

보물 제255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幢竿支柱)>를 만나게 됩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절에서 각종 법회나 행사시 당(깃발)을 내걸 때 사용하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하는데, 높이 428cm 규모의

이 당간지주는 1300여년 전 부석사 창건 당시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조 유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간지주라고 합니다.

 

 

 

당간지주 사이에는 연꽃 모양으로 장식한 원형의 간대석(杆臺石)이 놓여져 있습니다.

 

 

 

당긴지주 옆에는 <浮石寺重修紀蹟碑(부석사중수기적비)>가 서있습니다.

오래된 고찰들은 가끔씩 수리를 하기 마련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시 수리한(重修)

자취를 기념하여 비석으로 남겨놓는 것입니다.

 

 

 

부석사 경내가 가까워진 것 같은데, 절집은 보이지 않고 가파른 돌계단이 나타나고

돌계단 위로 보이는 것은 <천왕문(天王門)>입니다.

 

 

 

천왕문의 기능은 부처님계에로의 접근을 실감케하고 경건한 마음을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터 이어지는 돌계단은 부석사 본법당인 무량수전까지 108계단이라고 합니다.

 

 

 

천왕문(天王門) 안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있는데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천왕으로

손에는 비파, , , 용 등의 지물을 들고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들을 밟고있는 형상입니다.

대체로 왼쪽에 동.남천왕, 오른쪽에 서.북천왕이 배치하게 되는데, 이 사천왕들은 불교경전에

나타나는 인도 재래의 신()으로서 불교의 수호신이 되어서 동서남북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천왕문을 통과해도 돌계단은 끝이 아닙니다. 저 멀리에 또 돌계단이 보입니다.

돌계단 위로 두 단으로 쌓은 석축 위에는 단청이 안된 마치 한옥의 대문 같은 문이 보이는데,

최근 새롭게 복원된 <회전문>이라고 합니다.

회전문은 흔히 생각하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런 의미는 아닐 것이기에 불교사전을 찾아보니

"양쪽에 날개채를 가진 솟을대문 형식으로 중생들의 윤회를 깨우치게 하는 의미의 문"이라네요.

 

 

 

회전문 아랫부분 멋진 곡선의 목재 문턱을 넘어서면서 그 뒤로 보이는

웅장한 범종루의 풍경은 내 발걸음을 조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회전문을 통과하자 꽤 넓은 공간이 펼쳐지며, 사찰 전각들 뿐만 아니라 삼층석탑과

나무들이 그 장소를 가득 메우고 있지만 무척이나 부드럽고 아늑함이 느껴집니다.

 

 

 

회전문을 통과하니 서로 모습이 아주 닮은 삼층석탑 두 개가 쌍둥이처럼 양쪽에서

나란히 반기고 서있는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인 <부석사 삼층석탑>으로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동탑과 서탑입니다.

높이는 동탑이 360cm, 서탑은 377cm로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것으로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 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래는 가람의 동쪽 약사골 절터에 있던 쌍탑을 1966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왔다고 하며

특히 서탑에는 익산 왕궁리5층석탑에서 가져온 석존사리 5과가 봉안되어 있다고 전해집니다.

 

 

 

동서 쌍탑 사이를 오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범종루(梵鐘樓)>가 서있습니다.

정면 3, 측면 4칸규모의 2층 누각인 부석사 범종루는 유수의 건축가들이 극찬할 정도이며

특이한 것은 전각의 세워진 방향이 여느 건물과 달리 측면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진입공간의 중심에 자리잡은 범종루는 부석사 전체배치를 살려주는 안정감 있는 건물로서

건물의 앞쪽은 팔작지붕의 형태이지만, 뒤쪽은 맞배지붕 형태를 취하고 있는 두 얼굴을 가진

비대칭형 건물이기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습니다.

 

 

 

범종루 어간 중앙에는 일주문 현판의 이름과는 달리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누각 2층에는 범종은 없고, 대형 법고(法鼓)와 목어(木魚), 운판(雲版)이 걸려 있습니다.

 

 

 

누각 아래층의 외진주(外陣柱:기둥을 겹으로 두른 건물에서 바깥쪽 둘레에 세운 기둥)

내진주(內陣柱:기둥을 겹으로 두른 건물의 안쪽 기둥)보다 훨씬 굵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건물의 하중을 많이 받는 가장 자리 기둥은 굵게, 마루의 하중만 받는 가운데 기둥은 거기에

맞게 가늘게 세워졌습니다.

 

 

 

범종루 아래층에서 올려다 본 모습입니다.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겹쳐 보입니다.

 

 

 

범종루 위 석축단 서쪽에는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또다른 범종각(梵鐘閣)이 있는데

1980년의 보수 정화공사 이후에 신축한 것이라고 하며, 기존 범종루에는 종의 하중 문제로

건축물 안전을 고려해 별도로 신종각을 세워 이곳에 걸어 놓은 것이 아닌가 추정해 봅니다.

 

 

 

범종각(梵鐘閣) 내부의 범종에 새겨진 "鳳凰山浮石寺(봉황산 부석사)"

 

 

 

안양루(安養樓)는 부석사 주불전(主佛殿)인 무량수전의 바로 앞에 세운 2층 누각(樓閣)으로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며 부석사를 구성하고 있는 축대 중 가장 높은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역할을 하는 누각입니다.

2단으로 쌓은 높고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졌으며, 앞쪽 2줄의 기둥은 아랫기단 위의 자연석

주춧돌에 놓여 있고, 뒷줄의 짧은 기둥은 윗기단에 놓이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안양루이자 안양문은 하나의 건물에 누각(樓閣)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셈인데, 누각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그 웅장함과 멋스러움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각의 정면 2층에는 '浮石寺(부석사)', 아래층에는 '安養門(안양문)'이란 편액이 걸려있는데,

2층에 걸린 <浮石寺>편액은 1956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부석사를 방문하여 쓴 글씨라고 합니다.

 

 

 

'안양(安養)'은 극락을 뜻하므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이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나타나게 되는 구조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누각을 통과하여 뒤돌아보면 앞쪽에 걸린 '안양문'과는 달리 '安養樓(안양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곳 출신인 석당(石堂) 김종호(金宗鎬)선생(1901~1985)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안양루를 통과하자 드디어 부석사 탐방의 하이라이트인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석등(石燈)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납니다.

 

 

 

특히 국보 제17호로 지정된 <부석사 석등(石燈)>은 높이 297cm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지대석과 간주석, 화사석, 옥개석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고, 앞쪽에는

방형의 배례석(拜禮石)이 현존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정제된 미를 간직한

우리나라 석등 조각의 백미라 할 만합니다.

 

 

 

석등 가까이에 카메라를 대고 화사석 사이로 들여다 본 무량수전의 현판 글씨입니다.

 

 

 

국보 제18호로 지정된 <무량수전(無量壽殿)>은 부석사의 중심불전으로 수덕사의 대웅전,

봉정사의 극락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건립시기는 정확히 알수 없고 신라 문무왕 때 짓고 고려 현종 때 중수했으나, 공민왕 7년에

왜구에 의하여 불타서 우왕 2(1376)에 원융국사가 중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은 아미타여래불을 모신 불전으로서 아미타여래불을 모신 불전을

대개 극락전(極樂殿),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 부릅니다.

 

 

 

무량수전은 앞면 5, 옆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형식으로 건물의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게 처리한 것과,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한 것, 기둥머리가 굵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막기 위한

배흘림기둥 등은 유의하여 볼 부분들로서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안정감이 있어 보입니다.

 

 

 

무량수전을 대표하는 건축양식인 배흘림기둥(아래 위는 가늘고 가운데는 굵은)

기둥의 위아래 굵기가 같을 때 중앙부분이 가늘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피하기 위해

기둥의 중간부위를 굵게 하였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습니다.

배흘림기둥은 고대 그리스 석조신전이나, 중국과 일본의 고대 건축물에서도 나타납니다.

 

 

 

문창살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아 더욱 멋스럽고 간결한 느낌을 줍니다.

 

 

 

무량수전 정면 어간에 걸린 편액은 중국 건물들의 편액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편액의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글씨로서 1361년 홍건적의 난(공민왕 10)으로 안동으로

피난 와 있던 시기에 쓴 것이라고 합니다.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은 건물 외관보다도 법당 내부의 모습에 더 잘 드러나 있습니다.

법당 천정의 모든 건축부재들을 노출시킴으로써 기둥, 들보, 서까래 등의 얼기설기한 엮임이

리듬감을 연출하여 공간을 확대시켜주는 효과를 주고 있으며, 외부와 마찬가지로 내부에도

배흘림기둥이 받치고 있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천년 전으로 거슬러온 듯한 느낌입니다.

 

 

 

대부분의 법당은 앞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불단이 있고 불단 위에 본존불을 모시지만

무량수전의 불상은 특이하게도 서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또 하나 특이점은

협시불(주불의 좌우에 모신 불상)이 없이 홀로 앉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배치한 데는 까닭이 있다고 하는데, 정면에 배치하면 입구에서 거리가 너무 가까워

공간감각을 확보할 수 없기에 왼쪽 끝에 불상을 배치하여 참배객들과 먼 거리의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며, 또한 불상 앞에 늘어선 기둥과 겹쳐보이게 되어 일반 법당에서 볼 수

없는 신비함과 장엄함까지 더해주는 고려인의 지혜와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량수전 뒷쪽 모습입니다. 어느 쪽에서 바라봐도 천년의 향기가 느껴지는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에 많은 이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 (2편으로 계속됩니다) ...........................................

 

 

 

 

 

 

 

 

출처 : 50대이상 불자모임
글쓴이 : 다빈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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