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수행의 의미
법상스님
젊은 불자들이 절에 가면
절을 많이 시켜서 싫다고 하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불교 수행의 핵심은
'절'이라는 수행방법에 그 핵심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불, 법, 승 삼보님을 비롯한 일체중생을 한없이 높이고
나를 한없이 낮추는 무아(無我)의 실천 수행이 바로 '절'
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절이라는 하심(下心) 수행이
불교에서 차지하는 수행적 의미를 조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를 한마디로 한다면 연기법(緣起法)이요,
이를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했으며
이는 일체 모든 존재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만한 인과 연이 서로 화합하여 만들어진
연기적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인연 화합된 속에 어느 것을 가지고 딱히
'나'라고 할 수 없기에 공이며 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라는 존재는 고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 만유가 서로 조화하여 이루고 있는
물거품과도 같고 신기루와도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결코 집착할 것이 못되는 무아(無我) 그 자체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이 몸뚱이를 가지고 '나'라고 하지만
사실 '나'라는 것은 우주만유가
인연에 따라 잠시 이 모습으로 나툰 것 뿐이지
본래의 나는 무량수, 무량광의
부처님 생명으로 '거대한 전체로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본래 집착할 바가 없는 것이 바로 '나' 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중생들은 '나'에 집착하여
'내 것'이라는 소유욕과
'내가 옳다'고 하는 고집에 빠져 있기에
항상 고통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 잘난 맛에 세상을 살아가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의 아상과 이기심을 키워 나가고 있습니다.
'나'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명예를 찾고 권력, 돈, 지위를 키워 가고 있는 것이
우리네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런 각종의 수단들을 통해
한없이 '나'를 높이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상태를 우리는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바로 이 '나다'하는 아상(我相)을
올바로 보고 깨우쳐
나를 비워내는 것이야말로
불교 수행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낮추는 하심의 수행은
이렇게 치켜 세우길 좋아하는 '나'란 존재에 줄 수 있는
훌륭한 양분입니다.
이 이기적인 작은 '나'를 볼 것이 아니라
일체 만유가 서로 인연 화합하여 이루어진
이 우주와 다르지 않은 '일체로서의 나'
즉 대아(大我)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나'를 한없이 낮추고
일체만유를 한없이 높이는 하심의 수행,
절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하심의 수행은 작은 '나'를 돌려
일체만유와 둘이 아닌 존재로서의
진정한 '참 나'를 찾을 수 있도록
아상타파의 길을 제시해 줍니다.
이 참 나를 찾는 길의 끝에
우리 참생명 실상의 어머니 '부처님'이
우뚝이 서 있는 것입니다.
이를 깨달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하심 하심 하면
하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몸과 마음을 낮출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고 말만 앞서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
하심 하심 말만 하는 것은
아무런 실천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몸이 먼저 하심을 해야
마음도 따라 하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절'을 할 때면
우리의 몸은 한없이 낮아지게 됩니다.
나에 대한 패배감으로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없이 낮아지지만 그 낮춤이
진정 높이는 것임을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하심의 훌륭한 수행 방법이 바로
'절'인 것입니다.
이처럼 절 수행은 나의 참생명,
참 나를 찾는 수행의 출발이며
궁극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절' 수행은
육체적으로도 훌륭한 양분이 된다고 합니다.
요가에서의 모든 몸동작을
모두 망라한 훌륭한 요가체조이기도 하답니다.
과학적으로도 절수행에 대한
훌륭한 논문이 나와
운동으로서도 훌륭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처음 출가 할 때
행자교육원에서 계속되는 수행과 교육으로
왠지 모르게 허리가 끊임없이 아파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3000배 철야 정진을 한다고 하여
허리 때문에 참 많은 걱정을 했었답니다.
그저 죽더라도 부처님 앞에서 죽고
허리가 끊어지더라도 해 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역시나 아파오는 허리는 끊어질 듯 했습니다.
특히 2000배를 지나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음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숙이고 또 숙였습니다.
이 많은 눈맑은 행자님들 앞에서 쓰러진다는 건
어쩜 큰 축복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2.500배 정도 하는데
이상할 만큼 하나도 아프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절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해서 허리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허리 아픔이 다 낳아진 것이었습니다.
행자교육원 기간 동안
거의 매일 수많은 절을 했었는데...
그 3000배가 나의 허리를 낳게 해 준 듯 했습니다.
그 때 요가와 절 수행을 많이 하신다던 행자님께서
절 수행을 하면...
자칫 현대인들처럼 의자생활을 많이 하는 분들이
허리가 조금씩 삐뚤어져 있기 쉬운데...
절 수행을 하면 허리가 올곧게 펴진다는 것입니다.
2.500배 할 때 그렇게 아픈 것이
교정되느라 그런 것 같다는 말을 해 주셨습니다.
그처럼 모든 면에서...
절 수행은 참 의미있는 수행입니다.
법우님!
절 수행을 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루 한 번 108배를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도 어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두는 이 마음 가운데 달려 있습니다.
하루에 한 15분 정도 투자하여
절 수행을 해 봅시다.
진정한 생활 속의 수행자가 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으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한다면 참 좋겠지만
아침이 힘들다면
밤에 잠자기 전에
혹은 막 집에 들어가서
샤워 하기 전에 하면 훨씬
상쾌해 질 것입니다.
푹 푹 찌는 한 여름 밤...
온몸을 찝찝하게 만드는 무더위...
이열치열이라고
방 문을 걸고
108 염주를 들고
한 배 한 배 시작합니다.
점점 절도 빨라지고
땀도 물 흐르듯 등줄기를 삭혀주고
그렇게 그렇게 흘러내린 땀방울 뒤에
얼음짱처럼이나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면
하...
그 마음 무엇으로 표현할까요...
그 뿌듯함이란...
일 배, 일 배 굽히는 속에
'참 나'는 무한히 드러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