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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염화미소(拈花微笑)

공 합장 2010. 5. 8. 20:03

 

 

 

불기 2554 부처님 오신날 법문

 

염화미소(拈花微笑)



1234567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_()_.

 

1은 해요. 2는 달이며, 34567은 화수목금토의 오행을 이름이니, 우주천지운행의 참모습입니다.

 

대(大)는 크다는 말이요. 방(方)은 방정(方正)하다는 뜻이요, 광(廣)은 한없이 넓다는 의미이니, 역시 우주천지를 뜻하는 말이겠습니다.

 

또 불(佛)은 각(覺), 즉 깨달음이라는 말이니, 이 깨달음은 참으로 ‘크고, 방정하고, 넓어서’그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까닭에 우주천지의 본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낱낱이 이러한 모습(꽃)으로 장엄된 것이 바로 우주의 진면목입니다. 또 경(經)이라함은 이러한 모습을 설한 내용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經)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이요, 먹으로써 쓰여진 것이 아님이며, 붓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생 본연의 마음자리 그대로인 것입니다.

 

나무(南無)란, ‘귀의(歸依)한다.’ 는 말이며, 아미타(阿彌陀)란,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 즉, 우주를 뜻하는 말입니다. 불(佛)이란, 깨달음을 불격화(佛格化)한 말이라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일체중생이 다 함께 귀의함으로써 대방광(大方廣) 불화엄(佛華嚴)의 세계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1, 염화시중(捻花示衆)

 

오는 21일은 불기 2554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2554년전 이 땅에 부처님이 오심으로 모든 중생이 다 평등한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다는, 그야말로 존재의 평등성을 통하여 낱낱의 가치와 존엄을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그 가치와 존엄에 때한 인정은 누가 준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사실은 누구도 변경하거나 고칠 수 없는 확고한 진리입니다. 이러한 진리는 공겁(空劫) 이전의 소식으로 마음과 마음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저 미래세가 다하여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염화시중(捻花示衆)의 미소(微笑)’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늘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이야기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인도에‘수다스’라는 구두쟁이가 살았습니다.

하루는 그의 집근처 연못에 때 이른 연꽃 하나가 핀 것을 발견했지요.

이 연꽃을 팔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뛰었습니다.

꽃을 들고 가다가 마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큰 부자가 탄 마차였습니다.

부자는 연꽃을 보더니 마차에서 내려 연꽃을 팔라고 했지요.

얼마를 받을지 몰랐던‘수다스’는 부자에게 얼마를 줄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부자는 500냥을 준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란‘수다스’가 연꽃을 주려는데 왕이 탄 마차가 다가왔습니다.

왕이 연꽃을 보더니 부자가 말한 액수의 네 배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부자도 지지 않고 또다시 네 배를 준다고 했습니다.

나중엔‘수다스’가 얼만지 계산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수다스’는 이들이 왜 그토록 연꽃을 사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었지요.

이들은 설법중인 부처님께 이 연꽃을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수다스’는 이들에게 말했지요.

“내가 직접 이 꽃을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마침내 이들이 부처님께 이르렀을 때 부처님이 말했습니다.

“수다스야! 나는 돈이 없는 사람이다. 너는 그 꽃을 파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수다스’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이 꽃을 부처님께 바치면 사람들이 부처님 얘기를 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저를 기억해 주겠지요. 저의 생계는 제가 꾸릴 수 있으니 돈은 필요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부처님은 아무말씀도 없었습니다.

설법이 끝날 시간이 되자 부처님은 그 연꽃을 손에 들었습니다.

아무도 그 뜻을 몰랐는데 오직 가섭존자만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부처님은 그 꽃을 가섭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 연꽃뿐 아니라 나의 모든 향기와 빛을, 나의 마음을 그대에게 전한다. 이제 나의 법(마음)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니 이 연꽃은 그 상징이다. 나의 모든 경험(깨달음)들은 이제부터 말없는 가운데 전해질 것이다.”

마하가섭은 미소로써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진리를 마음과 마음으로, 설법 없는 설법으로 전하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 ‘수다스’에게서 받아 가섭에게 전한 그 연꽃은 물론, 모든 연꽃은 ‘처염상정(處染常淨)’ 즉, 더러운 진흙 속에 살지만 그 진흙이 묻지 않아서 항상 깨끗하듯이, 중생의 성품도 이와 같아서 온갖 번뇌와 망상, 생사 고통에 헤매고 있지만 본래 성품은 조금도 물들지 않아서 영원무구(永遠無垢)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꽃은 ‘인과동시(因果同時)’라고 하는, 즉 꽃이 피고 져야 열매를 맺는, 원인과 결란는 서로 다른 때, 다른 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생길 때 바로 결과도 함께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 없을 뿐입니다.

연꽃은 꽃망울이 생길 때 이미 씨방도 함께 생긴다는,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존재의 이분성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는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는 존재의 참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하가섭이 부처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그 마음이며, 부처님이 꽃을 들자 미소(微笑)를 지었던 바로 그 소식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소식에 의하여 오늘 우리도 연등을 밝히고 부처님 오심을 봉축하고 찬탄함으로서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고 설법 없는 설법으로 말없는 이 가운데서 영원무구(永遠無垢)한 저 거룩한 부처님의 마음을 전해 받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세상의 권력이나 명예, 재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저 ‘수다스’의 장자나 대왕에게서 받을 수 있었던 많은 재물을 거절하고 부처님에게 바친 그 연꽃이며, 바로 ‘수다스’ 그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또, 부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하늘 위 하늘 아래오직 내가 홀로 높다.’ 고 외치신 그 소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때의 사람들(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알지 못하므로, ‘지천지지무인회(指天指地無人會),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켜도 아는 사람이 없다.’ 라는 탄식을 하고, 스스로 출가 수행하여 다시 깨달음을 보임으로서 누구나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있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모범을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의 이심전심의 소식과 함께 그 가르침을 결집하여 만든 것이 불경(佛經)이며, 이는 세계 많은 종교 가운데서 가장 우뚝한 금자탑으로 서 있게 된 것입니다.


2, 종교와 불교

(1) 종교

종교는 인간을 정화하고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며, 현실의 고통을 해소하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2) 불교의 특징 : 깨달음의 종교, 실천의 종교, 지혜의 종교, 자비의 종교, 평화의 종교, 평등의 종교입니다.

첫째, 깨달음의 종교 : 불교는 스스로 깨달음, 즉 자각(自覺)의 종교입니다. 다른 신(神)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각하여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입니다. 즉, 불보살에 의지하는 타력문(他力門)이 있지만 종내는 자각(自覺)으로 이르게 하는 자력문(自力門)입니다.

둘째, 실천의 종교 : 불교는 형이상학적, 현학적, 관념적 종교가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을 지향하는 실천과 행동의 종교입니다.

※ 이에 걸맞는 유명한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대시인 백낙천이 도림선사를 찾아가 "불교의 대의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이라고 하니, 백낙천은 웃으며 “그런 것은 세살 어린이도 다 아는 게 아니냐?” 고 반문하니, 스님은 “비록 세살의 어린애도 다 알지만, 여든 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셋째, 지혜의 종교 : ‘지혜’란 우주의 진리, 존재의 실상을 여실히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 즉 존재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윤회와 고통의 근원으로 간주합니다. 이는 12연기(緣起)의 첫째인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넷째, 자비의 종교 : 자비(慈悲)의 원뜻은 발고여락(拔苦與樂)입니다. 자(慈)는 여락(與樂), 즉 상대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비(悲)는 발고(拔苦), 즉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 그러나 불교의 자비는 모든 것을 용납하고 수용하는 ‘섭수(攝受)’와 악(惡)에 대해서 분노하고 굴복시키는 ‘절복(折伏)’과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섯째, 평화의 종교 : 인류 역사상 종교라는 미명(美名)하에 수없는 성전(聖戰)으로 무고한 생명이 끔찍한 죽음을 당해왔습니다. 이는 종교본질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결과에서 초래된 비극입니다. 불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어 평화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평등의 종교 : 타종교는 신과 주종(主從)의 관계이지만, 불교는 부처와 중생의 본질에 차이가 없습니다. 이는 중생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당시 인도의 사성계급제도를 부정하고 이를 타파하려고 하셨습니다.

(3) 중생계의 실상(實相) : 제로섬게임, 서바이블게임, 적자생존,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너의 행복은 나의 불행, 안수정등(岸樹井藤), 생사윤회(生死輪廻), 전도몽상(顚倒夢想) 등 이러한 세계가 중생계의 실상입니다.

※ 안수정등(岸樹井藤): 어떤 사람이 코끼리에 쫓겨 우물을 발견하고 그 속으로 피합니다. 다행히 칡넝쿨이 있어 거기에 매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물 안에는 독사들이 우글거리고, 쥐 두 마리가 칡넝쿨을 갉아 먹고 있었습니다. 이런 절대 절명의 위기상황에 처했으나, 칡넝쿨 꽃에서 떨어지는 꿀맛에 취해 위급한 현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는 위급한 상황을 대처해야하는데 꿀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 더 큰 재앙을 불러온다고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4) 불교의 이상(理想) : 이고득락(離苦得樂), 전미개오(轉迷開悟), 혁범성성(革凡成聖), 안심입명(安心立命), 해탈(解脫), 열반(涅槃), 견성성불(見性成佛) 등 이러한 것이 바로 불교의 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첫째, 이고득락(離苦得樂) :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진정한 열반락(涅槃樂)을 얻는 것입니다.

둘째, 전미개오(轉迷開悟) : 미혹하고 어리석음에서 해탈하여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셋째, 혁범성성(革凡成聖) : 범부(중생)적인 것을 고쳐서 성인(부처)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넷째, 안심입명(安心立命) : 마음속의 모든 번뇌. 망상을 잠재우고 편안하게 하여 천명(인연)에 맡김으로써 열반에 드는 것입니다.

※ 해탈(解脫) : 생사(生死)의 속박(束縛)과 윤회(輪廻)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 열반(涅槃) : 모든 욕망과 번뇌의 불꽃이 꺼진 고요한 적멸(寂滅)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기 안에 내재된 부처의 참 성품을 직관(直觀)하여 부처가 되는 것, 견성성불의 목적은 구경열반(究竟涅槃), 즉 해탈열반에 있는 것입니다. 해탈열반이란, 일체의 번뇌와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그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은 대자유를 말하는 것이며, 중생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므로 그 성품을 바로 보아 부처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2010.05.06.염화당 중홍.

 

 

출처 : 천주사
글쓴이 : 염화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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